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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37

무소유 (18) 잊을 수 없는 사람 수연(水然)스님! 그는 정다운 도반이요, 선지식이었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입으로 말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그런 사람이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그는 사소한 일로써 나를 감동케 했다. 수연 스님! 그는 말이 없었다. 항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였다. 그러한 그를 1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다. 1959년 겨울, 나는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혼자 안거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래야 삼동三冬 안거 중에서 먹을 식량과 땔나무, 그리고 약간의 김장이었다. 모시고 있던 은사 효봉 선사가 그 해 겨울 네팔에서 세계 불교도 대회에 참석차 떠나셨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지낼 수.. 2010. 3. 16.
무소유 (17) 그 여름에 읽은 책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못박아 놓고들 있지만 사실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한 계절이다. 날씨가 너무 청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엷어 가는 수목의 그림자가 우리들을 먼 나그네 길로 자꾸만 불러내기 때문이다.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서 책장이나 뒤적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고리타분하다. 그것은 가을 날씨에 대한 실례다. 그리고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도 우습다. 아무 때고 읽으면 그때가 독서의 계절이지. 여름엔 무더워서 바깥일을 할 수 없으니 책이나 읽는 것이다. 가벼운 속옷바람으로 돗자리를 내다 깔고 죽침이라도 있으면 제격일 것이다. 수고롭게 찾아나설 것 없이 출렁거리는 바다와 계곡이 흐르는 산을 내 곁으로 초대하면 된다. 8,9 년 전이던가, 해인사 소소산방(笑笑山房)에서 을 독송하면서 .. 2010. 3. 16.
무소유 (16) 나그네 길에서 사람들의 취미는 다양하다. 취미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적인 여백이요 탄력이다. 그러기에 아무개의 취미는 그 사람의 인간성을 밑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개인의 신체적인 장애나 특수사정으로 문밖에 나가기를 꺼리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대개의 경우 여행이란 우리들을 설레게 할 만큼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호주머니의 실력이나 일상적인 밥줄 때문에 선뜻 못 떠나고 있을 뿐이지 그토록 홀가분하고 마냥 설레는 나그네길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허구한 날 되풀이되는 따분한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다. 봄날의 노고지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저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온다. 훨훨 떨치고 나그네길에 오르면 유행가의 가사를 들출 것도 없이 인생이 무어.. 2010. 3. 16.
무소유 (15) 조조할인 지난 일요일, 볼일로 시내에 들어갔다가 극장 앞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장사진을 보고, 시민들은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낮의 뙤약볕 아래 묵묵히 서 있는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을 때 측은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먼 길의 나그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피로와 우수의 그림자 같은 걸 읽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남들은 권태로운 영역을 탈출, 녹음이 짙은 산과 출렁이는 물가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을 텐데, 무슨 자력에라도 매달리듯 마냥 같은 공해 지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들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시정의 서민들이 기껏 즐길 수 있는 오락이라는 게 바로 극장에서 돌아가고는 있지만. 우리도 가끔 그런 오락의 혜택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백주의 장사진에 낄 만한 .. 2010. 3. 16.
무소유 (14) 회심기 내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한도인(閑道人)이 될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서 부침하는 중생이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 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3년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절의 경내지境內地가 종단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한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 2010. 3. 16.
무소유 (13) 동서의 시력 내 몸이 성할 때는 조금도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앓게 되면 육신에 대한 비애를 느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모른 체했다가, 조금 지나서는 큰 마음 먹고 약국에 들른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토록 무거운 병원 문턱을 들어설 때 그 비애를 느낀다. 진찰권을 끊고 차례를 기다리며 복도에 앉아있는 그 후줄근한 시간에는 내 육신이 사뭇 주체스러워진다. 의사를 대했을 때 우리는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된다. 재작년이던가, 눈이 아파 한동안 병원엘 드나든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성전 간행 일로 줄곧 골몰했더니 바른쪽 눈이 충혈되고 찌뿌드드해 무척 거북스러웠다. 안약을 넣어도 듣지 않았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하루는 마음을 크게 먹고 신문에 자주 나오는 안과를 찾아갔다. 나처럼 서투르고 어설픈 사람이.. 2010. 3. 16.
무소유 (12) 탁상 시계 이야기 처음 사람과 인사를 나눌 경우, 서투르고 서먹한 분위기와는 달리 속으로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지구상에는 36억인가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데, 지금 그 중의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우선 만났다는 그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하늘 밑, 똑같은 언어와 풍속 안에 살면서도 서로가 스쳐 지나가고 마는 인간의 생태이기 때문이다. 설사 나를 해롭게 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와 나는 그만큼의 인연이 있어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나와 마주친 것일까. 불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시절 인연이 다가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과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 중에 하나가 내게 온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상에는 내 생활을 거동케 하는 국적 불명의 .. 2010. 3. 16.
무소유 (11) 흙과 평면 공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이 말은 근대화에서 소외된 촌락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는 오늘의 속담이다. 우리 동네에서 뚝섬으로 가는 나루터까지의 길도 그러한 유형에 속하는 이른바 개발 도상의 길이다. 이 길은 몇 해 전만 해도 산모퉁이며 논길과 밭둑길이 있어 사뭇 시골길의 정취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지구 개발인가 하는 바람에 산이 깎이고 논밭이 깔아뭉개지더니 그만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다. 물 빠질 길도 터놓지 않아 비가 오거나 눈이 녹으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그래도 이 길을 다니는 선량한 백성들은 당국에 대한 불평도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오고간다. 가히 양같이 어진 백성들이라 할 만하다. 이제 이 길에 얼음이 풀리니 장화를 신고도 발을 떼어놓기가 어렵다... 2010. 3. 16.
무소유 (10) 종점에서 조명을 인간의 일상생활은 하나의 반복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대개 비슷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다. 시들한 잡담과 약간의 호기심과 애매한 태도로써 행동한다. 여기에는 자기 성찰 같은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 부침하면서 살아가는 범속한 일상인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타성의 흐름에 내맡긴 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모방과 상식과 인습의 테두리 안에서 편리하고 무난하게 처신을 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지닌 생생한 빛깔은 점점 퇴색되게 마련이다. 생각하면 지겹고 답답해 숨막힐 일이지만 그래도 그렁저렁 헛눈을 팔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일상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나그네 길을 떠난다. 혹은 한강 인도교의 비어 꼭대기에 올라가 뉴스거리가 되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201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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