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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의 나날은 한마디로 표현해 소음이다. 주간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대중 매체는 현대인들에게 획일적인 속물이 되어 달라고 몹시도 보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입술에서도 언어를 가장한 소음이 지칠 줄 모르고 펑펑 쏟아져 나온다. 무책임한 말들이 제멋대로 범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진정한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시장이나 전장에서 통용됨직한, 비리고 살벌한 말뿐이다. 맹목적이고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현대인들은 서로가 닮아간다. 동작 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범속하게 동질화되고 있다. 다스리는 쪽에서 보면 참으로 편리할 것이다. 적당한 물감만 풀어놓으면 우르르 몰려들어 허우적거리는 무리를 보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소음에 묻혀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은 접촉에서의 과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다에서 인간적인 허탈에 빠지기 쉽다. 계절이 바뀌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끝없이 방황한다. 잿빛 소음에 묻혀 생명의 나뭇가지가 시들어 간다.
그러한 대지에 가을이 오니 그래도 마른 바람소리가 수런거렸다. 귓전으로가 아니라 옆구리께로 스치는 그 소리를 들으니 문득 먼길을 떠나고 싶은 묵은 병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 날로 털고 나섰다.
서라벌! 그렇다. 신라로 가자. 불국사 복원공사의 현장을 언제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다. 동대문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경주행을 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소음의 도시여.
제3한강교를 벗어나자 천장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그네 길에 가끔 들리는 음악은 정다운 길벗일 수 있다. 때로는 마른 바람소리 같은 구실을 해준다. 무심히 창밖에 던진 시야에 초점을 맞추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여독을 씻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해서 울려 퍼질 때 그것은 정다운 길벗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곤욕이다. 그 음악이라는 것도 한결같이 파리똥이 덕지덕지 붙은 곡조들 뿐. 북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도, 왜 남한의 곡조와 가사는 저렇듯 청승맞고 병들어 있는가 싶다. 가히 자유 대한의 그 자유라는 빛깔을 저렇게 각색해야만 하는가. 누가 이런 소리를 듣고 눈을 지그시 감을 수 있단 말인가.
견디다 못해 안내양에게 좀 쉬어가면서 듣자 했더니 그야말로 마이동풍이었다. 거듭 요구하자 "다들 좋아하는데 왜 그래요?"하면서 눈을 흘겼다. 곁자리를 보니 가락에 맞추어 발장단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행자라는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내가 낸 돈으로 차가 달리고 있는데 거기에 내 뜻은 전혀 개입될 수 없다. 모처럼 소음의 일상에서 벗어나 맑고 조용하게 날개를 펴고자 나그네가 되었는데 소음은 '카 스테레오'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줄곧 나를 추적해 오고 있다. 아, 이런 소음이 문명이라면 나는 미련없이 정적의 미개 쪽에 서겠다.
도로 연변에 울긋불긋 덮인 슬레이트 지붕들, 산자락이나 개울가하고는 전혀 조화가 안 되고 있는 그 슬레이트의 어설픈 덮개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의 유행가를 있는 대로 몽땅 내뱉으며 달리고 있는 이 고속버스가 네 바퀴 달린 차량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포의 전율이었다.
차를 몰고 가는 운전사의 차장격인 정부는 국민의 식성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락만을 줄기차게 틀어댈 것이다. 자기네 상식으로 손님들의 양식을 잴 것이다. 손님들이 낸 요금(세금)으로 달리고 있으면서, 카 스테레오까지도 그 돈으로 돌리면서 손님들의 의사는 전혀 모른 체할 것이다. 때로는 엉뚱하게 반나체 춤을 보이려고 자기네끼리 곧잘 어울리는 워커힐 같은 데로 데려갈지 모른다. 부질없는 상상일까.
서울에서 경주까지 그 소음 때문에 나는 나그네의 멋을, 홀가분한 그 날개를 잃고 말았다. 1,300원어치의 소음에서 내리니 심신이 더불어 휘청거렸다. 서라벌은 간 데 없고 관광 도시 경주가 차디차게 이마에 부딪쳤다.
외부의 소음으로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비극이다. 설사 행동반경이 달나라에까지 확대됐다 할지라도 구심求心을 잃은 행동은 하나의 충동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음에 너무 중독되었기 때문에 청각이 거의 마비상태라는 점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음의 궤짝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일상인들. 그것을 밑천으로 바보가 되어 가는 줄 모르는 똑똑한 문명인들.
자기 언어와 사고를 빼앗긴 일상의 우리들은 도도히 흐르는 소음의 물결에 편승하여 어디론지 모르게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도 하나의 소음일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소음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기 떄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말이 소음이라면, 그로 인해서 빛이 바랜다면 인간이 슬퍼진다. 그럼 인간의 말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 그것은 마땅히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이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갖게 되고 자기 말에 책임을 느낀다. 그러기 떄문에 투명한 사람끼리는 말이 없어도 즐겁다.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무수한 말이 침묵 속에서 오고 간다.
말 많은 이웃들은 피곤을 동반한다. 그런 이웃은 헐벗은 자기 꼴을 입술로 덮으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소음에서 나와 소음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말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울린다.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이전에 깊은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는 정말 피곤한 소음의 시대다. 카뮈의 뫼르소가 오늘에 산다면 이제는 햇빛 때문이 아니라 소음 때문에 함부로 총질을 할지 모르겠다.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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